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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부천의 활동가 및 예술기관 관계자로부터 부천의 문화예술정책 이슈 및 방향성을 듣는 'FOUCS'입니다.

여러가지연구소, 장소와 이별하는 방법

글 | 민경은(여러가지연구소 대표)

지난 2011년부터 이사를 반복하며 ‘여러가지연구소’를 운영해왔습니다. 이사의 이유는 모두 공교롭게도 빌라 건축으로 인한 밀려남이었어요. 매번 500미터쯤을 옮겨 다니며 공간을 이어 온 지난 8년간, 원미동 일대에 빌라를 짓는 소음은 잦아졌고, 이웃들은 훌훌 떠나갔어요. 그러다 지난 2월, ‘여러가지연구소’의 세 번째 공간도 빌라 건축을 위해 비워야 했습니다. 오래된 모든 것이 지켜져야 하는 것은 아니며, 또 모든 것이 그럴 수도 없을 테지만 일 년 새 많은 집이 무너지고 우후죽순 올라오는 새 집들을 보며 참 서운했습니다. 장소 상실. 하나의 장소가 지닌 무한한 가능성의 여지가 더 많은 면적을 확보하기 위한 우리 시대의 욕망으로 사라지는 경험이 ‘여러가지연구소’에 고스란히 쌓였습니다. 반복되는 장소 상실의 경험은 세상을 사는 우리들의 몸을, 우리들의 감각을 뒤흔들어 놓습니다. 한 장소를 떠난다는 것은 그 장소에 속한 다른 모든 사람을 떠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든 사람을 떠난다는 것은 존재가 애착을 끊어야 한다는 강요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점거 전시 <결국,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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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가지연구소’가 머물렀던 1976년생 건물이 곧 무너진다는 소식을 동료 작가들에게 전하며 전시를 제안했습니다. 건물과 살아온 시간이 얼추 비슷한 예술가들이 모여 연구소의 활동 흔적이 남은 벽에 선언을 새기는 것으로 점거를 시작했어요. 짐을 빼고, 쓸고 닦아 놓은 공간에 작가들과 게릴라전처럼 모여 보름 남짓 함께했습니다. 공간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작업에 집중했지요. 벽장은 그림이, 다락방은 이 도시를 사유하게끔 하는 글과 사진이, 40년 이상의 때가 쌓인 창문은 작은 집이 되는 점거가 이어졌습니다. 전시를 준비하기에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예술가들은 공간에 머물면서 서로의 삶을 연결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그 시간이 느껴진 것일까요. 그동안 ‘여러가지연구소’에서 함께 활동했던 어린이들, 어른이들, 시민들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전시 공간이 된 집 안에서, 마당에서, 옥상에서 오랜 시간 머물며 봄 인사를 나눴습니다. 저마다의 모습대로 전시 공간을 경험하는 모습을 보니, 곧 사라질 공간이지만 이 곳이 새로운 아우라를 뿜어내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추상적 공간에 시간과 경험이 쌓이면 의미로 가득한 구체적 장소가 된다는 것은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전시를 통해 장소가 곧 활동임을 다시 한번 진하게 경험했지요.


기억을 노래하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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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의 시간을 보내는 중에도 우리의 마음은 바뀌어갑니다. 아쉬움을 나누는 동안 앞으로의 가능성을 보게 되고, 함께 나아갈 방안도 찾게 되죠. 예술은 대안적인 실재가 필요하다는 것과, 고통이나 역사에 의해 손상되지 않는 객체의 가능성도 보여줍니다. 그렇게 실재를 가리키는 것이죠. 이런 이유로, 회복은 추모와 애도를 통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에 잃어버렸던 것을 보면 회복 역시 가능하니까요. 훼손되기 전의 상태를 기억하기 위한, 그러니까 상실에 대한 추모와 애도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과 잊어버린 것들을 다시금 불러오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다 같이 노래했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 잊어버린 것들을 다시금 불러오기 위해.


네버 엔딩 ‘이별식’과 회복의 몸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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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는 끝이 났지만, 삶의 공간은 닫히지 않았습니다. ‘여러가지연구소’의 공유텃밭이었던 ‘참견 텃밭’에는 연둣빛 싹들이 싱그러움을 머금고 자라고 있습니다. 마당을 수시로 드나들던 ‘참견 텃밭’의 참견쟁이들은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의 거처가 걱정입니다. 우리는 힘을 모아 풀과 나무를 최대한 파내 옮겨심기로 했습니다. 건물이 무너져 식물들이 묻히기 전에 살리기 위해서요. 2월 한 달 내내 했던 이사, 갑작스러웠던 전시와 ‘이별식’을 끝내고, 식물들을 이사 보낼 5월을 맞이합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에게 필요한 그것은 무언인가?’, ‘인간이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란 질문을 시작한다면, 우리에겐 시간과 공간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인간에겐 온기, 사회, 여유, 안락과 함께 고독, 창조적인 작업, 경이감도 필요하니까요. 이런 걸 알게 되면 인간은 언제나 어떤 것이 자신을 인간적으로 만드는지, 비인간적으로 만드는지 알게 되죠. 그리고 우리의 의식을 약화시키고, 호기심을 무디게 하는 것들을 가려낼 수 있을 겁니다. 생활 속 예술 활동과 장소를 통해 우리가 우리 삶의 창조자란 것을 이번 ‘이별식’에서 느꼈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결국, 보게 된 것’들을 마주하며 ‘봄’의 주체로서 다시금 새로운 공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 글 │ 민경은(여러가지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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