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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공동체를 새롭게 하는 예술의 힘

글 | 임학순(가톨릭대학교 미디어기술콘텐츠학과 교수)

함께 살아가는 사람의 의미를 캐고, 공유하는 과정

2년 전 어느 봄날, 갑자기 ‘어머니는 누구인가’란 화두가 나를 깨웠다. 자식이 곧 삶이었던 어머니, ‘사느냐 죽느냐’의 경계에서 자식을 위해 살기를 선택한 어머니, 그래서 현실주의자가 되어 일하고 또 일했던 어머니. 어머니라는 외피를 걷어낸다면, 인간으로서의 실존은 무엇일까. 막막했다.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당황했다. 그래서 어머니의 실존을 찾아 나섰다.

난 2년 동안 산골 고향 집에서 홀로 살고 계시는 어머니를 자주 찾아뵙고, 인터뷰했다. 어머니의 어린 시절부터 하나씩 기억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 상황 속에서의 감정도 함께 하나하나 캐 나갔다. 그리고 그 장소로 찾아가 당시의 느낌을 공유했다. 산비탈을 개간해 만든 황토밭도 함께 걷고, 다슬기를 잡았던 고산 다리 밑 냇가에도 갔다. 태양초를 말려 내다 판 전주 남부시장, 곶감과 대추를 팔았던 고산 시장, 마늘을 팔았던 삼례시장에도 갔다. 오 남매에게 꿈을 심어준 화산중학교에도 찾아갔다. 아버지가 젊을 때 노름했던, 쓰러져가는 집 앞에서 회상에 잠겼다. 죽으려고 신발을 벗었던 자살바위와 경천저수지도 찾아갔다. 아버지가 방황에서 돌아와 함께 벚꽃 놀이를 했던 송광사 벚꽃 길도 찾아갔다. 어머니는 마음속 깊숙이 묻어놓았던 감정들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어머니와의 기억 여행을 하면서 하루도 울지 않은 날이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아버지 일기 속에 기록된 어머니 이야기. 사진, 가족 모임 때 촬영된 동영상. 어머니가 쓴 문자 기록은 없었다. 학교에 다니지 않아 문자를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머니 혼자 찍은 사진은 젊은 시절에 사진관에서 찍은 영정사진이 두 개 있을 뿐이었다. 결혼 일주일 전에 가족과 찍은 사진 한 장을 찾아, 어머니 단독 이미지를 복원해 청춘 시절의 어머니 사진을 만들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미안하고 고맙다고 말하며 그려준 그림 하나를 소중히 보관하고 있었다. 매화나무 위, 매화꽃이 가득한 둥지에 암컷 새가 깃을 세우고 창공에서 사랑을 구하는 수컷을 바라보는 그림이다.

어머니와의 기억 여행을 함께 하면서, 조금씩 인간으로서의 어머니가 보이기 시작했다. 어머니라는 외피를 뚫고, 진솔한 삶의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 속에 감춰진 나의 모습도 조금씩 그 실체를 드러냈다. 나는 생애 이야기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 남매를 만나기 시작했다. 시를 함께 읽으며, 오 남매 각자의 시선과 느낌으로 어머니를 새롭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묻어 두었던 상처들이 돋아나 터졌다. 가난한 농부의 자식으로서의 운명과 자식이 삶의 전부인 어머니의 존재는, 오 남매에겐 또 하나의 짓누름이고 억압이었다. 어머니의 큰아들 편애는 딸들에겐 불공평한 기억으로 남아있기도 했다. 곧 오 남매의 만남과 소통이 잦아졌다. 사진 치유 작가와 함께 가족 이야기를 공유하고, 묻혀있는 어머니의 감성을 사진에 새롭게 담았다. 이 과정은 어머니와 가족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의 장을 만들어 주었으며, 묻힌 상처와 응어리를 풀어내는 치유의 장이었다. 오 남매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또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것인가를 기획하기 시작했다. 책 ‘정례가 시집와서 오 남매를 낳았다’가 나오고, 출판 기념회와 시화전, 그리고 사진전을 열었다. 살풀이춤도 공연하고, 어머니 ‘정례와의 대화’ 콘서트도 열렸다.

나의 사례는 평범한 일상 속에 묻힌 가족의 의미를 캐고, 이를 공유하는 과정을 예술적 과정으로 풀어냈다. 그리고 가족 문화를 직접 실천하고 새롭게 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생애 이야기 시와 사진, 그리고 가족과 함께 공유하는 문화 이벤트는 가족 구성원 사이의 소통을 넘어, 가족 ‘치유’를 경험하게 했다. 어머니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나 자신을 성찰적으로 바라보는 계기도 마련해주었다. 함께 참여한 손녀, 손자들에게도 가족의 의미를 경험하는 기회가 되었으리라. 이러한 가족 문화 접근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구성원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해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을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술가와 가족 간 소통과 협업 또한 가족들이 예술적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이는 개개인이 자신의 내면을 깊이 바라보고 성찰할 수 있게 한다.


문화의 사회적 가치와 가족공동체 회복

현대 사회에서 가족공동체 해체가 사회 문제로 대두하고 있다. 가족 폭행과 범죄, 높은 이혼율, 우울증, 겉도는 대화, 단절된 소통, 거친 언어, 세대 간 문화 격차, 스마트폰만 바라보고 있는 식탁 문화. 이러한 가족 문제는 가구의 소득이 높아진다고 해결되지 않으며, 가족 구성원들의 교육 수준이 높아진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가족 문제의 많은 부분이 태도, 신념, 가치관 등 문화적 요인에 의해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가족이 무엇인지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다문화 가정이 늘어가고 있지만, 문화 다양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취약하다.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을 조금만 더 깊이 이해한다면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 가족 문제를 해결하는 데 문화적 접근 방법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와 사회적 인식은 취약한 실정이다.

최근 들어 문화 다양성 정책, 문화예술교육 정책, 생활문화정책, 길 위의 인문학 사업, 예술 치유 사업 등 많은 문화정책이 일상 속으로 들어오고 있다. 주체적 표현, 소통과 공유, 태도와 행동의 변화, 치유 등 다양한 개념이 문화정책의 과정과 효과 차원에서 중요해지고 있다. 문화의 사회적 가치, 인문학적 가치가 문화정책의 중요한 가치로 제기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예술은 ‘인지 과정(cognitive process)’으로, ‘삶의 거울’ 역할을 하며 성찰적 인식과 상상적 경험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의 가치를 일상 속에서 어떻게 실현하고, 일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방법론적 논의는 아직 미흡하다.


일상의 가족문화 운동이 활성화되어야

앞으로 문화와 예술이 가족 문제를 해결하고, 가족 공동체를 회복하는 중요한 자원이자 방법이라는 사회적 인식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가족 공동체에 대한 문화적 접근이 일상의 삶 속에서 지속해서 스며들 수 있는 여건 역시 조성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정책 사업을 지원하는 단기적인 처방으로는 한계가 있다. 가족 구성원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변화해나갈 수 있는 가족 문화 운동이 활성화되어야 한다. 이와 관련해 지역 문화정책에서는 가족 문화 운동의 촉진자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가족문화 기획자를 발굴하고, 소통과 공유의 장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가족 문화기획자는 문화의 사회적 가치를 이해하고, 이를 가족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용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춰야 한다. 가족 문화 활동은 스토리텔링, 놀이, 소통과 공유, 자료 아카이빙, 문화 여가 활동, 문화여행, 가족문화 이벤트 등 다양할 것이다. 가족 문화기획자는 이러한 가족 문화 활동을 기획해 가족 구성원들이 참여하고 소통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면 된다.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의 의미를 캐고, 이를 가족 혹은 이웃과 공유하는 활동 역시 가족문화기획자의 중요한 역할이다. 앞으로 부천문화재단에서도 ‘가족문화 기획자 학교’를 운영한다면 가족문화 운동의 발원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 글 | 임학순(가톨릭대학교 미디어기술콘텐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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